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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봄호(통권 194호)_권두언_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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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0 15:36 32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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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강수돌(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한국 사회가 비교적 최근에 경험한 사회적 참사만 해도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9년 씨랜드, 2003년 대구 지하철, 2006년 서해대교 참사, 2014년 세월호 참사 등으로, 매번 한꺼번에 수십 수백 명이 생명을 잃거나 크게 다쳤다. 운명이 바뀌는 순간은 짧으나 트라우마(충격과 상처)는 깊고도 길다.

참사가 벌어질 때마다 충격과 공포, 안타까움과 슬픔 속에 온갖 책임 공방이 일어나고, 분노와 항의, 논쟁과 성찰을 거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고 다짐하나 불행히도 참사는 반복된다. 20221029이태원 참사역시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꽃 같은 청춘 15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참사가 벌어지면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여기서 우선 독일 철학자 헤겔의 말을 상기해 보자.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점은, 우리가 그간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The only thing we learn from history is that we learn nothing from history.) 이 말은 역사 자체가 배울 게 없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깨치지 못한 점을 반성하라는 얘기다. 이는 기억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과 통한다. 사회적 참사도 마찬가지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과거 참사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우선, 이태원과 같은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 실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가를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본다. 나아가, 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향후 참사의 반복을 예방하기 위한 건강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첫째, 세월호 참사이건 이태원 참사이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들 상당수는 속으로 그 사람들, 정말 재수가 없었네.’ ‘왜 하필이면 그때 그곳에 갔나?’ ‘내 가족이 거기 없어서 참 다행.’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물론, 즉각적으로 드는 느낌을 속일 순 없다. 문제는 우리네 의식이 그 차원에만 갇힐 때다. 일차원적 의식은 참사의 원인을 희생자 개인 탓으로 돌린다. 그 연장선에서 내가 그런 데 가지 말라고 할 때 내 말을 잘 들었어야지.’ 또는 현장에서 탈출한 다른 사람들처럼 재빠르게 나왔어야지.’ 이런 식으로 희생자 나무라기를 한다. 이런 태도는 사태의 책임을 운명(misfortune)으로 돌리거나 개인의 어리석음(stupidity)으로 몬다. 언제 어디서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참사, 이런 식으로는 결코 사전에 예방할 순 없다. 늘 사후적인 희생자 비난만 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다음 참사의 준비 과정이다.

둘째, 이와 연관된 모습으로, 그 현장 자체를 편견과 혐오를 섞어 낙인(stigma) 찍는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노동자 자녀들이 대거 포함된수학여행단이 타고 가던 배라 했다. 이태원 참사의 경우, “할로윈 축제는 원래 서양 문화인데, 이상한 게 수입되어 물을 흐려 놓았다.”거나 거기는 마약쟁이나 게이, 레즈비언 같은 사람들이 벌이는 축제.”라는 식으로 낙인을 찍으려 했다. 이 태도 역시 사태의 예방이나 해결엔 도움이 못 된다. 오히려 희생자와 생존자를 배타적으로 나눔으로써 그 어떤 공감이나 소통, 연대도 불가능하게 한다. 사회 구성원 중에 노동자 내지 그 자녀가 아닌 경우가 어디 있으며, 그것 자체가 어떻게 사회적 참사의 원인인가? , 축제나 행사의 뿌리가 서양이라 문제라면, 한국 고유의 축제나 행사에선 아무 사고도 없다는 보장이 있는가? 참사엔 국적이 없다. 게다가 모든 문화는 두루 섞이면서 천천히 진화를 거듭한다. 마약쟁이나 성소수자들을 낙인찍는 태도 역시 문제다. 호불호를 떠나 그들의 존재 자체가 참사의 원인일 수는 없다. 이런 태도는 마치 민주화 시위를 두고 정권이나 언론이 불순 세력의 선동이라 하는 격이다. 사태 해결이나 예방은커녕 오히려 정권 안보를 위해 양심적 시민을 배제하려는 불순한 의도만 드러낸다. 그렇게 되면 불행히도 또 다른 참사가 온다.

셋째,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자 명단 발표가 큰 논란을 불렀다. 원래 참사가 일어나면 언론이나 정부가 나서서 희생자 이름을 발표하고 그 가족을 찾아 수습대책을 논의하는 게 본연의 책무다. 그러나 이번 이태원의 경우, 명단 발표 자체가 교묘히 방해를 받았고, 심지어 시민언론 민들레와 종교계에서 명단을 발표하자 일부 정치권이나 언론, 시민단체 등에서 패륜 행위라거나 정치적 목적에 악용’, ‘불법이란 막말까지 했다. 나 역시 처음엔 명단 공개가 유족에게 엄청난 결례인지 의아했다. 그러나 곧 나는 오히려 이름과 얼굴을 모른 채 참된 애도가 가능한가?’ 싶었다. 심지어 명단이 없으니 희생자 가족을 사칭해 각종 지원을 받으려는 자까지 생겼다. 유족들 입장에서는 얼굴과 이름 없는 추모는 가짜 추모였으며 ‘2차 가해였다. 오히려 정권 입장에서는 명단이나 얼굴이 공개되고 유족회가 결성되어 (‘세월호경우처럼) 집단행동이 시작되면 정권 안보에 불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122일 유가족들의 기자회견을 보니,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그나마 민변(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회) 같은 공신력 있는 단체가 주축이 되어 11월 중순경 고립됐던 유족들을 모아내고 상호 협의 아래 희생자 명단을 수집, 공개한 것이 다행이다. 1122일 첫 기자회견 후 유족 65여 가족이 모여 유가족협의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국가의 책임 방기도 큰 문제이고 당연히 비판해야 하지만, 정부나 국가에 기대지 않는 시민사회의 자기 조직화(self-organizing)야말로 최선임이 드러났다. 다만, 이런 움직임이 좀 더 빨랐다면 초기 분란이나 혼란도 방지했을 것이다. 이 또한 이번 참사의 교훈이다.

왜 당초엔 명단 공개가 그렇게 패륜 행위로 내몰렸을까? 그것은 (정권의 무책임과 무능함 외에) 앞서 말한 첫 번째, 두 번째 태도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유족들 입장에서 희생자들이 하필이면 그곳에 간 잘못을 범했다거나 쓸 데 없이 서양 축제에 간 잘못또는 아이가 마약쟁이나 성소수자로 낙인찍힐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명단 공개를 꺼린 게 아닐까?

그래서 늘 두려움이 문제다. 두려움이 사람의 건강한 행위 능력을 저해하는 장애물이다. 물론, 이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거듭된 사회적 폭력과 배제의 역사가 낳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건강하게 이기는 방법은 열린 소통과 연대다. 이런 점에서 민변이 유족들과 소통 및 연대를 한 것은 대단히 선구적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회적 참사 앞에서 얼마나 건강한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참사를 반복 또는 예방할 가능성이 달라진다. 물론, 일반인들이 아닌 정치가나 행정가들이 참사를 대하는 태도는 더 문제투성이다. 무책임, 무능력, 무감각은 그들의 고질병이다. 그 결과, 고위층일수록 꼬리 자르기식 대처로 끝내려 하거나 책임 전가식 태도로 일관한다. 이태원의 경우, 대통령 경호실, 법무부장관, 서울시장, 경찰서장, 용산구청장 등이 책임 있는 당사자다. 이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거짓말, 증거 인멸, 상황 조작 등을 예사로 한다. 용산 대통령실 이전도 문제였거니와 (이태원 할로윈 축제 와중에) ‘마약과의 전쟁을 위해 작년까지만 해도 착실히 했던 시민 안전 조치가 완전 부재했다. 재난 예방과 안전 확보를 위해 각종 기구나 제도를 만들어 놓긴 했지만, 그것을 책임성 있게 운용하려는 의지나 능력은 고위층으로 갈수록 희박하다.

돈 중독, 권력 중독 탓이다. 이들이 가장 잘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감각이 없으면서도 있는 체하며, 능력이 없으면서도 있는 체하고,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책임지는 척한다. 고인이나 유족 앞에 직접 사과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추상적으로 사과 흉내만 내는 것이야말로 국민 기만이자 자기기만이다. 정직한 자신의 느낌(그게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을 속이면서 지위와 권력, 부와 탐욕에 한사코 집착한다. 이런 자들이 주도하는 사회 구조 전반이 곧 중독 시스템이다(앤 윌슨 섀프, <중독 사회: 우리는 모두 중독자다>, 이상북스 참조).

 

중독 시스템은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에 빠진 개인과 마찬가지로 병든 사고, 병든 태도, 병든 행위를 보이는 구조와 과정을 일컫는다. 그렇다. 사회적 참사가 우리의 소망과 달리 거듭 발생하는 까닭은 사회 자체가 중독 시스템이기 때문! 따라서 이 병든 시스템을 운용하는 당사자들(정치가, 행정가, 기술자)은 물론 그 시스템에 적응해 살고 있는 일반 구성원들(국민, 시민)이 모두 중독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한 시스템을 만드는 게 근본 해법이다.

첫째, 돈 중독, 권력 중독, 경제성장 중독에 빠진 시스템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상호 존중하며 공생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참사의 반복 없이 더 안전하게 살 수 있다. 시스템 전환의 논의를 지금부터라도 새로 시작해야 한다.

둘째, 사회적 약자, 소수자, 이주민, 외국인 등을 차별적 시선으로 보는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이 살아 숨 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순수 혈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다양한 존재가 공존하면서 상호 이해와 협력의 수준을 높여 나갈 때 그 사회는 더 건강하게 지속된다.

셋째, 특권층이나 기득권층이 표준이라 하는 사회적 기준에 맞춰 한 줄 세우기로 통치하는 거대 사회는 닫힌 사회다. 이런 사회는 무한 경쟁과 차별, 분노와 증오를 조장, 불평등과 양극화를 정당화한다. 진정 더불어 살려면 마을 공화국에 기초한 열린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느낌과 태도, 행위를 건강하게 쇄신하고 동시에 병든 시스템을 건강하게 전환함으로써, 사회적 참사의 공포가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어쩌면, 아이들이 매일 핏기 없이 학교를 오가고, 노인들이 삶의 즐거움 없이 시간만 때우고, 노동자들이 경제 가치를 추구하는 노동에 매몰(노동현장에선 해마다 2천 명 이상 죽음)된 우리네 일상 자체가 이미 일상적 참사아닌가? 이런 면에서 이태원 참사는 매일 벌어지는 일상적 참사의 연장선일지 모른다. 따라서 참사의 반복을 막으려면 우리의 일상인 중독 시스템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메시지처럼, “두려움은 당신을 감옥에 가두고, 희망은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이 희망은 우리 스스로 아직 없는 길을 하나씩 만드는 과정 안에 있다. 아무리 두려워도 서로 손잡고 함께 나가면 길을 만드는 즐거움을 맛보리라!***


강수돌 : 1961년 경남 마산 출생. 날마다 생태 뒷간에 똥을 누고 "똥아, 잘 나와 고마워!"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25년간 대학생을 가르친 고려대 명예교수이며, 지금은 경남 하동에서 텃밭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자본이 사람을 멈추기 전에, 부디 제발>, <잘 산다는 것>, <더불어 교육혁명>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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