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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봄호(통권 194호)_마음공부_획일성을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기

최고관리자
2023-07-20 15:48 34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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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월 보현법회]

 획일성을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기

 

오늘은 <21세기 약사경> 중에서 획일성만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서 다양성을 꽃피우는 깨달음의 문명으로이 내용과 연결하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상을 한번 같이 확인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혹시 살면서 내 얼굴하고 똑같은 사람을 본 적 있으세요? 없지요? 그리고 여러분은 각자 나의 색깔대로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사는 방식으로 나도 살고 있습니까? 실은 다 내 폼대로 사는 것 같지만 우리는 나도 모르게 획일화되어 살고 있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획일화를 불러오는 상대 비교의 사고방식

우리를 획일화시키는 대표적인 사고방식이 어떤 게 있을 것 같습니까?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온갖 상처를 받고, 분노를 일으키고, 원망을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아주 본질적인 것이 바로 상대 비교입니다. 우리는 거의 상대 비교의 사고방식으로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 비교의 사고방식을 갖고 삶을 살아가는 한, 삶은 편안해질 수가 없습니다. 넉넉할 수도, 충만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불행이 뭐죠? 불만족이 불행이죠. 행복은 뭘까요? 자기 삶에 만족하는 게 행복입니다.

내 것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상대 비교 때문에 저 사람 것이 더 좋네 하는 식이면, 비교할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 학력, , , 피부 색깔, 지식, 모든 게 다 비교 대상입니다. 어쨌든 상대 비교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삶은 확 달라지죠. 여기에 눈을 뜨도록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실상을 알고 보면 상대 비교할 일이 없습니다. 그물의 그물코처럼 이루어진 자신의 참모습대로 살면 될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내 멋대로 살면 된다는 얘기하고는 다른 얘기입니다.

 

소유 가치로 획일화된 사고방식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로 뭘 갖고 비교를 하는지 살펴봅시다. 대표적인 한 가지가 소유의 사고방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와 비교해서 얼마를 가졌는지, 비교하면서 살고 있고, 그로 인해 삶이 엉망진창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고 쓰는 말 가운데, 소유의 사고방식을 표현한 대표적인 말들이 몇 가지 있죠? 1, 최고, 승리, 부자. 부자 되는 건 좋은 거야, 부자 되면 행복해, 1등이 최고야, 1등만이 희망이야. 죽기 살기로 1등 해야 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이 말들은 우리가 얼마나 소유의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는지, 사고방식 자체가 얼마나 획일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 최고, 부자가 되기 위해 더 많이 더 많이, 더 빨리 더 빨리, 더 쉽게 더 쉽게등을 답이고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것을 얻게 되면 따라오는 결과도 더 재밌게, 더 맛있게, 더 멋있게, 더 편리하게, 더 예쁘게, 더 기분 좋게 등 이렇게 될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획일화되어 있지요. 이런 것들이 모두 소유의 사고방식입니다.

 

소유의 사고방식이 가져오는 결과

이런 소유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인생은 형편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감도 가질 수 없고, 자부심을 가질 수도 없고, 만족감을 가질 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내 것’, ‘더 편한 것’, ‘더 쉬운 것등을 갈구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한 삶이 더 바빠지고, 더 혼란스러워지지요. 더 빨리하면 할수록 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매일매일 무수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편리를 추구한 이유는 삶이 더 편안하고 여유로워지길 바라서인데, 편리해질수록 결과는 어떻습니까? 더 바빠집니다.

대상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소유의 사고방식, 상대 비교. 그리고 더 좋은 것, 더 쉬운 것, 더 편한 것, 더 여유로운 것을 추구하는 방식으로는 기대하는 결과를 결코 충족할 수 없습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삶, 풍요로운 삶,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거죠.

 

존재의 사고방식으로 누리는 풍요로운 삶

제가 누리는 삶은 어떨까요? 저는 실상사를 잘 누리고 있습니다. 제 것은 아니지만 실상사의 풍경도, 문화재도 누리고, 지리산도 누리고, 저 멋있는 구름도 누리고, 바람소리도 누리고, 새 소리며 매미 소리도 누리고. 내 소유는 아니지만 있는 것 그 자체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어요. 소유가 아니고 누리는 것으로 보자면 이보다 부자가 없지요.

우리가 있는 것 그대로를 누리는 실력만 있다면 누릴 것은 넘쳐납니다. 지금 실상사에서 천일결사를 하면서 미혹문명 내려놓고 깨달음의 문명으로 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도 내용을 보면 바로 이런 실상에 눈을 뜨자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다른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실제 우리가 얼마나 획일화되어 있는가를 정확하게 직시하면 됩니다.

 

 

[10월 보현법회]

중도적으로 공부하면 삶은 반드시 바뀐다

 

지난 번 법회에서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그 얘기를 오늘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실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존재의 실상, 세계의 실상, 삶의 실상, 역사의 실상 또는 민족의 실상, 국가의 실상, 인종의 실상, 생명의 실상, 자연의 실상 등등 어떤 것이든 그 실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정말 다양성으로만 이루어졌을까요? 아니면 통일성으로만 이루어졌을까요? 부처님께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요?

부처님, 세상은 다양성으로 이루어졌습니까? 통일성으로 이루어졌습니까.”

이제 답을 다 아시죠? (웃음)

다양성으로만 이루어졌다고 단정한다면 그건 단견이야. 통일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단정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단견이야. 양극단을 버리고 있는 사실대로 봐.”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모두 웃음)

그러면 있는 사실대로 보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있는 사실은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있는 사실 자체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있는 사실은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개념으로도 규정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 등으로 표현합니다.

 

말에 빠지지 말고 뜻을 살피자

그럼에도 인간은 소통하면서 살아야 하기에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면 문제가 발생하겠죠. 말을 하는 순간, 실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분리된 것처럼 또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데 마치 고정된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말에 속지 말라.” 또는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상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말로 소통할 수밖에 없으니, 잘 소통하고 삶을 잘 살아가려면 말에 빠지지 말고 뜻을 잘 살피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양성이라는 말로 설명해야 할 상황이 있을 수 있고 다양성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할 내용이 있을 수 있겠지요. 또 통일성이라는 말로 설명해야 할 상황도 있을 수도 있고, 통일성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할 내용도 있습니다. 실상은 양자택일로 설명될 수 없는 법입니다.

말의 한계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잘 설명해 보려고 노력한 결과물이 불일불이(不一不二)라는 개념입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는 뜻이지요. 이 같은 사고방식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의식문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 그대로 공이요 공이 그대로 색이다 또는 색과 공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어떤 말을 들으면 (말 속에 담긴) 뜻으로 듣기보다는 말의 지배를 받습니다. 실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데 말로 표현하는 순간, 분리되거나 고정된 것처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사용하곤 합니다. 그 결과 문제가 생겨나죠.

 

중도적으로 공부하면 삶은 달라져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말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말에 속지 않도록, 말에 지배받지 않도록,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나타난 개념들이 불일불이(不一不二)’,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 ‘불립문자(不立文字)’,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개념을 책에서 읽거나 배우다 보니까 별것 아니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실제로는 불조들이 정말 죽기 살기로 노력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마치 말 타고 달려가면서 산 능선을 한번 쓱 쳐다보듯이 취급하지 말고 말 한마디, 개념 하나하나가 불조(佛祖)의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졌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해서 그 내용이 내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도록 공부하는 게 불교 공부이고 수행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공부하면 삶은 달라집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그냥 주마간산 격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다시 말하면 중도적으로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보니 뭘 많이 하긴 하는데도 잘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법회에서 이야기했던 통일성과 다양성에 대한 내용과 연결해서 오늘 좀 더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도법스님 법문 정리_현미선. 실상사에서 일하고 있는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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