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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봄호(통권 194호)_전북생명평화자치도

최고관리자
2023-07-20 16:07 31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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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전라북도를 상상한다

 

 

정웅기인드라망생명공동체 운영위원장

 

 

> 생명평화는 문명전환의 서사가 될 수 있는가

> 내가 꿈꾸는 생명평화 전라북도

 

 

새로운 서사의 필요성

많은 인류학자들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전환은 인간이 을 사용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낙뢰 등 자연발화 불을 힘센 포식자들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후 다양한 실험과 도전 끝에 인간은 불을 다룰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불이 상용화되는 15천 년 전부터는 수렵채집 대신 농업이, 유랑생활 대신 정주생활을 하고, 마을이 형성된다. 그 뒤 인류는 청동과 철, 숫자, 문자, 나침반, 선박, 인쇄술, 증기기관,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이기들을 3천여 년 동안 쉼 없이 개발하였다. 지금은 그 정도가 지나쳐 삶의 터전인 지구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그것이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까 염려하는 정도가 되었다. 불이 인류문명의 시발이 된 것은 어떻게 하면 불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 다양한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인류사의 변화 또한 마찬가지로 변화의 열망 혹은 현실불만족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고, 그 서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기후위기는 20~30년 전만 해도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사회 일부의 경고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의 공식 견해로, 일국단위의 정책을 간섭하고 규제하는 국제규범이 마련될 정도에 이르렀다. 그만큼 현실이 매우 엄중함을 말해준다. 생태적 시각으로 보면 재난의 진행속도에 비해 대응 수준은 여전히 느리고 미흡하며, 전망은 비관적이다. 인류가 앞으로도 기존의 방식과 질서를 고집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변화에 직면할 것이고, 공멸의 길로 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기후위기에 대한 지구적 공감대가 급속하고 강력하게 형성되어온 과정도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변화이다. 이 또한 위기의 서사가 작동한 때문이다. “지금처럼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의 산업문명이 유지된다면 이번 세기 안에 인류공멸의 파국을 피할 수 없다.”는 쪽으로 빠르고 넓게 공감대가 확산중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성장, 저성장, 생태주의와 같은 새로운 담론들이 나오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은 최근 저서 회복력 시대에서 새로운 가치의 핵심은 효율성에서 적응성으로 이행이며, 그 구체적 내용은 성장번영 / 소유권접근권 / 판매자-구매자 시장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 / 선형 프로세스인공두뇌 프로세스 / 수직통합형 규모의 경제수평통합형 규모의 경제 / 중앙집중형 가치사슬분산형 가치사슬 / 거대복합기업민첩한 첨단기술 중소기업 / 지식재산권오픈소스 지식공유 / 제로섬게임네트워크 효과 / 세계화세방화 / 소비자 주권주의환경책임주의 / 국내총생산(GDP)삶의질 지수 / 부정적인 외부효과순환성 / 지정학생명권 정치학으로의 전환을 포함한 경제 및 사회의 전면적 변화와 함께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효율성에서 적응성혹은 회복성으로 전환해야 파국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서사의 골자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주장하는 새로운 문명의 서사는 다소 복잡하고 어렵다. 다방면에서 일어나야 할 변화의 총체성을 잘 설명해주는 반면, 그러한 내용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적응성이나 회복성이라는 말이 좀 낯설기도 하다. “불을 만들어 천적들을 쫓아야겠다.”거나 문자를 만들어 정확한 소통을 해야겠다.”는 식의 단순한 서사로까지 발전하는 데는 앞으로도 많은 공력이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20세기 가장 강력한 서사는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것들이었다. 보수, 진보,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이러한 서사들에 사람들이 몰입되고, 삶을 던졌다. 아직 인류는 기후위기와 팬데믹 이후의 새로운 문명에 대한 서사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21세기를 전후해 4차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서사들이 나왔지만, 그런 류의 서사들은 기후위기의 해법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20세기 말부터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쓰이고 있는 서사들은 여전히 구체적이고 대중적이지 못하다. 지금은 새로운 서사가 더욱 다양한 집단에서 다양한 내용으로 만들어져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가운데 어떤 서사들이 시민에게 더 쉽고 명료하게 인지 공감될 때, 변화는 비로소 도도한 물결이 될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잘못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고치려고 애쓰는 이는 늘 소수였다. 위기의식이나 죄의식만으로 다중이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다수는 그렇게 해도 괜찮겠네. 한번 해보자.”라는 긍정적인 서사에 반응하고 합류한다. 수많은 담론과 복잡한 변혁이론이 홍수를 이뤘던 1987년 민주화운동 당시의 주요 서사가 시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아보자. 한국도 직선제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보다 더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쓰여야 한다. 욕심으로는 한 발 더 나아가 잘하면 현실이 될 수 있겠네.”라는 희망의 싹을 티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꿈꾸는 생명평화 전라북도에 대한 대화와 토론의 과정이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입장에서 문명전환의 새로운 서사는 탐진치의 사회화에서 깨달음의 사회화로 전환이다. 기존의 사회질서가 욕망()의 사회화(성장과 효율이라는 명목으로 욕망의 극대화, 주로 자본주의 이후 심화) 분노()의 사회화(상대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를 조장하는 사회질서, 자본주의보다 긴 인류사의 부정적 측면) 무지()의 사회화(한생명임을 망각한 무지와 이분법, 욕망과 분노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등의 잘못된 신념)의 길을 걸어온 데서 비롯됐으며, 이 물꼬를 돌려 깨달음의 사회화로 전환하는 것이 문명전환의 방향이자, 인류가 나아갈 길이라는 생각이다. 탐진치로 조직된 사회에서 깨달음(바른 이해와 통찰)으로 조직되는 사회로! 27백 년 전 붓다가 그랬던 것처럼 존재의 실상에 대한 사무친 깨달음이 이 서사의 열쇠말이다. 지금 실상사에서 진행하는 문명전환을 위한 결사와 기도는 대체로 이러한 공감 하에서 이뤄지고 있다.

 

생명평화는 새로운 서사의 열쇠말이 될 수 있는가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 소비를 인류가 지금처럼 유지한다면 기후위기는 재앙이 되어 문명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다. 영화 매드맥스에 그려진 것처럼 그 과정에서 벌어질 약탈과 파괴의 광기들을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새로운 인류의 생존방식에 대한 필요성은 앞으로 다양한 서사를 만들어낼 것이다다. 생태주의 담론들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너무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낙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많은 서사들 가운데, 모두의 공감을 얻어 변화의 나침반이 될 수 있는 서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체화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과연 21세기 기후위기 시대 생명평화는 문명전환 서사의 열쇠말이 될 수 있을까? 생명평화라는 단어는 20여 년 전 지리산 운동의 과정에서 나왔다. 김지하 선생을 비롯한 생명운동의 선각자들과 지리산 운동을 함께한 대중들이 좌우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삶의 가치와 지향을 찾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 뒤 생명평화 탁발순례와 생명평화결사, 인드라망 운동 등에서 생명평화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왔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곳은 종교계이다. 그 가운데 도법스님은 생명이 안전하게, 그 삶이 평화롭게라는 단순한 말로 생명평화를 설명하곤 한다. 최근 월드컵 경기에서 생명평화무늬를 몸에 새긴 축구선수가 화제가 되었듯이, 안상수 교수가 디자인한 생명평화 무늬도 세상에 조금 알려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생명평화는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말이다.

 

파급력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문명전환의 서사에 생명평화라는 말보다 적절한 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진영간 대결문화가 강고한 한국사회에서 어쩌면 이 정도를 대체할 공감의 언어를 찾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나은 말이 나오면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생명평화를 보편적인 전환의 키워드로 삼고 상상력을 키워나갈 수밖에 없다.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더 나은 열쇠말이 찾아지면 당연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평화를 문명전환 서사의 열쇠말로 삼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묻게 된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우주 만물은 깊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크고 작은 어울림을 통해 서로를 돌보는 삶으로 전환시켜내자. 그것이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최선의 몸짓이고, 자연도 뭇생명도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다. 생명가치의 회복을 바탕으로 뭇생명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길을 만들자.” 좀 더 단순하게 욕망의 무한 추구에서 단순 소박한 삶으로 적대와 증오에서 더불어 사는 평화의 삶으로 분열과 배타에서 어울려 사는 공동체 삶으로.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겠다.

 

제가 속한 인드라망이 생명평화의 서사에 담아온 내용들을 보면,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는 삶, 마을공동체에 기반하여 농촌도 빛나고 도시도 빛나는 사회, 다툼대신 화쟁으로 상생공존을 모색하는 사회, 지구적 연대와 협동도 빛나고 로컬도 빛나는 조화로운 사회에 대한 지향 등이다. 산내를 비롯한 실현지들을 중심으로 그러한 생각으로 살면 현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제안하고 실험하고 가다듬는 과정에 있다.

 

생명평화 운동가들을 결집시킨 새로운 서사도 있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는 것이었다. 타자화와 편가름, 증오와 다툼, 승패를 다투는 방식이 운동의 대세이던 시절(지금도 그런 경향이 많이 남아 있지만), 매우 중요한 방향의 전환을 담은 것이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주류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는 오늘의 이 위기를 헤쳐갈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 아닌가 싶다. 이 서사는 여전히 유효하다. 기후변화를 바라거든 내 삶의 현장에서 먼저 내 소비생활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최근 기후정의를 넘어 기후평화로 전환하자고 제안하는 생명운동 진영내의 움직임도 맥락을 같이 한다. 문명의 이기를 누려온 각자의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성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고,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너나 할 것 없이 생명의 실상을 참되게 알고, 그 실상대로 살고자 하는 몸짓을 나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제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갈 시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먼저 평화가 되려는 노력과 더불어 세상을 평화롭게 가꾸려는 노력을 긴밀하게 결합시켜야 할 때이다. 내면의 성찰과 세상의 변화는 어느 하나를 선택/포기할 것이 아니라 함께 빛나야 할 문명전환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내용도 좀 더 구체화되어야 한다. 왜 이런 전환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누가 할 것인지를 다양하게 상상하고 나름의 답안을 채워넣어야 한다. 자기 현장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내용과 방식으로 가정이나 직장, 커뮤니티와 같은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마을, 지역사회, 국가, 인류, 지구별까지 생명평화공동체로 재조직하자는 적극적인 의지를 담아내야 한다.

 

전라북도, 새로운 질서의 필요성

전라북도를 잘 모르지만, 준비 모임 과정에서 들었던 두 가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전북이 메가 시티와 같은 국가개발정책에서 늘 소외되어 왔으며, 같은 호남 지역인 광주전남에 비해서도 차별받고 있다는 소외감이 전라북도에 내재되어 있다는 이야기였고, 두 번째는 20년이 넘게 새만금 블랙홀이 전라북도를 집어삼켜 왔다는 것이다. 새만금이 마치 전북 발전의 유일한 해결책처럼 되어 다른 합리적인 논의와 공론의 장 자체가 마련되기 어려웠고, 그 속에서 정작 새만금 개발계획은 뜯어볼수록 비현실적이고 허황되다는 평가였다. 설혹 부분적으로 개발이 된다 한들 정치권+지역행정+토호세력의 이익 외에 지역의 균형발전과는 거리가 먼 국소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다. 선거 때면 여야 할 것 없이 새만금을 앞세운 선심성 지원계획을 남발하다, 정작 집권 후에는 생색내기에 그치는 일이 되풀이 되면서, 새만금은 시민사회에서조차 버리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계륵을 다루는 것처럼 어려운 사안이 되었다. 이제는 생명평화 전라북도를 실현함에 있어 그동안 새만금을 둘러싼 개발-보존의 이항대립을 넘어 새만금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이번에 출범한 김관영 전북지사의 5대 핵심사업을 살펴보았다. 상세한 사업계획을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5개 대기업 계열사 유치’, ‘미래차 산업벨트 구축’, ‘국제금융도시 육성’, ‘새만금 첨단농업 클러스터 구축’, ‘새만금 국제투자진흥지구 지정’, ‘K-문화지원센터 건립’, ‘국제학교 유치와 같은 장밋빛 구호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국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모여 사는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어느 지역에서도 실현하기 녹록치 않은 아이템들이자 산업의 논리, 경제의 논리로 봐도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사업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거기에 지어진 화려한 공장과 회사와 국제도시에 누가 있을 건데?” “서울 사람들이 그거 누리려고 전북에 올 수 있어?”라고 물어보면 답이 궁색해진다. 개발시대에 대한 성찰의 흔적도 없고, 최소한 시대변화를 담고자 하는 균형감도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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