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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봄호(통권 194호)_생명평화 자치에 던지는 물음

최고관리자
2023-07-20 16:09 34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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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계는 어떻게 태동하는가?

-전북생명평화포럼을 준비하며 다시생각해본 생명평화이야기

 

사발지몽(주요섭) / ()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

 

오랫동안 나의 세계에 전라북도는 거의 없었다. 대략 두 가지 이유 때문일 테다. 첫째, 나와 연결된 이야기가 적었다. 둘째, 쌓인 정()을 느낄 수 없었다. 이제 나에게 전라북도는 또 하나의 세계다. 아직은 멀고 낯설지만 조금씩 알아차리고 있다. 친근해지고 있다. 그런데, 전라북도가 힘들다. 인구는 줄고, 산업은 취약하고, 농촌과 농업은 갈수록 쇠락한다. 물론 나의 감각과는 다르지만, 엄연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전라북도다. 나는 오늘 또 다른전라북도의 태동을 예감한다. 또 다른 전라북도의 태동에 관한 생각을 꺼내본다.

 

다시’, 또 다른 세계를 탄생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

 

우리는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나의 언어로 말하면,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키고자 열망했다. 변혁을 위한 유력한 방법 중 하나는 비판과 대안이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다시라는 개념을 통해 또 하나의 방법을 탐색한다.

 

비판과 대안, 바로-보기와 새로-보기

다시의 관점에서 비판은 그 안에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진리의 관점에서 오류를 비판하는 것이다. 물론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입장은 타자의 그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대안역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안이 양자택일로 인식될 경우, 숨겨진 독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의 관점에서, 대안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대안들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로보기나 새로보기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혹은 새로같은 말도 하나의 구별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르게 보기는 진리/거짓을 구별하는 것이고, 새로 보기는 새로움/낡음을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별을 통해서만 세상을 기술(記述)할 수 있다. 요컨대, 구별을 통해 하나의 세계가 창조된다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구별이라는 자각이 없이 자신의 바름과 새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생명역시 관찰된 생명이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것살아있지 않은 것을 구별한 개념이다.).

 

복수(複數)의 세계들

앞에서 대안은 대안들이라고 했거니와, 최근 SF영화들은 복수의 우주들, 즉 다중 우주론이 대세다. 우주는 우주들이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복수의 자연을 뜻하는 -자연주의(multi-naturalism)’가 뜨고 있다. ‘하나의자연, ‘다양한문화가 아니라, 자연 역시 복수라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공간 역시 시·공간들이다(“시계는 시간을 측정하지 않는다. 시간을 구성한다.”는 경구가 떠오른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들이다. 우리는 제각각, 입장에 따라 다른 대한민국을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함께 살기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전일성(holism) 개념이나 부분/전체프레임으로 부족하다. ‘변증법적 통일에 빗대어 말하면, ‘분화된 통일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시’, 또 다른 세계 함께 만들기

한 마디로, 또 다른 구별을 통한 다시보기, 다시쓰기, ‘다시 함께 이야기 만들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별의 철폐가 아니라, ‘구별의 자각자각적 구별이 나의 발상이다. 이를테면, 좌파/우파, 진보/보수, 노동/자본과는 구별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구별들과 다른 또 다른 구별 작동을 통해 전개되는 또 다른 세계의 태동에 주목하고(다시 보기/-觀察), 또 다른 구별을 발명하자는 것이다.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다시쓰기/-記述). 자기와 타자에 대한 다시보기와 다시쓰기를 통해 또 다른 자아, ‘또 다른 세계를 산출하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변혁은 하나의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을 통해 전체 세계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 된다. 이를테면, 변화는 분화(分化, differentiation)’를 경유한다. 새로운 세계의 태동이 변혁의 시작이다.

 

생명평화 다시보기

 

앞에서 일종의 다시(?)을 간략히 이야기했거니와 생명평화도 다시 보고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생명평화 담론의 혁신, 혹은 또 다른생명평화, 혹은 생명평화(2.2, 2.3, 3.0, 4,0...)일 수도 있다.

 

_‘생명평화 다시보기의 환경들

생명평화 다시보기를 위해서 먼저 팬데믹-기후재난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우리가 경험하는 미증유의 생태학적 문제들은 또 다른 세계 태동의 환경이 되기 때문이다. 로봇, 인공지능, 생명공학 등 과학기술적 문제들도 물론 주목해야 할 조건들이다. 우리는 이제 기계들과의 평화를 현실의 문제로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새로운 담론과 서사들에 주목해야 할 때이다. 인류세, 포스트휴먼, 새로운 실재론들, 우주정치학 등이 그것들이다.

특별히 개인적으로는 몸의 사유가 중요하게 다가온다. ‘(신체)’의 재발견/재발명이다. 또 다른 생명평화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몸은 세계의 영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를테면 몸은 우주(생명-마음-사회-기계)의 기본 매체다. 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첫 번째 척도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 이전에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몸으로 사는 존재, ‘느끼는(有情)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세계상에서 세계상은 세계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 확실성의 종말불확실성의 시대를 절감하며, 역설적으로 의미구성의 시대, 의미의 자기창조 시대를 예감한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 이후 뉴노멀을 묻는다. 세계의 목적과 방향 및 척도의 부재와 의미상실의 시대를 이야기하다. 정확히 말하면, 준거상실이다. 신도, 자연도, 인간도, 민족도, 민주주의도 더 이상 확고한 준거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구성된 것임을, 인공적인 것임을 안다. 하나의 이야기, 서사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거꾸로 의미구성의 시대에 진입했음을 깨닫는다. 주어진 의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각적으로 의미와 서사를 생성해야 한다. 길을 만들면서 길을 가야 한다. 모든 길은 새길이다.

 

_생명 다시보기

생명은 물론 하나의 개념이다. 표상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생명의 본질을 묻지 않는다. 어떤 생명인지를 묻는다. 어떻게 생명이 되는지 묻는다. 생명 개념에는 수많은 관념들이 얽혀있다. 특히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바이러스를 통해 얻은 생명에 관한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난다. 작은 깨달음이다. 바이러스는 생명이면서 생명이 아니다. 바이러스는 생/사가 미()결정된 반()생명적 생명체이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숙주를 만나는 조건에서만 생명이다. 바이러스의 생명의 역설을 통찰케 한다. 생명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의 경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계가 있어야 생명이다. , /사의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 사라진다. 생명은 비()생명과 함께 산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열망하는 생명시대는 상생의 시대가 아니라, ‘상생/상극역설의 시대, ‘/역설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사상의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 우리의 생명사상은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의 구별에 머물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살아있는 것은 어떻게 살아있을까?”를 묻는다. 이제 우리는 생명/신명, 생명/영성을 구별한다.

 

_평화 다시보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뉴스를 보며 얻은 다시 확인하는 깨달음 하나. 평화는 전쟁과 함께 온다. 평화의 역설이다. 평화는 비()평화와 함께 온다. 돌아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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