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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여름가을호(통권 195호)_전북생명평화자치도_‘생명평화 전라북도’를 상상한다 ― 정웅기

인드라망관리자
2023-11-02 10:54 16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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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의 눈으로 본 전북특별자치도


정웅기 •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운영위원장



1. ‘생명도시’를 위한 몇 가지 전제


‘전북특별자치도 회의자료’(230530, 전북시민단체와의 간담회)를 보았다. 사업의 제목만 있고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지 않아 섣부르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전북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욕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생명도시’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많은 고민에서 나왔을 것이다. 비록 국가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차별화 차원에서 생명이라는 말을 가져다 썼다 해도, 이런 단어가 도정의 전면에 등장한 자체만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왕 생명도시 생명경제라는 그릇을 만들었다면, 그 이름에 걸맞게 어떤 내용을 담을지 자유롭게 검토하고, 깊이 탐구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지금은 무조건 개발이나 무조건 보존 논리가 통용되는 시대가 아니다. 어떤 것은 개발하고, 어떤 것은 보존할지 어떤 것은 집중하고 효율화할지, 어떤 것은 전환시대에 맞게 재구성할지 현장의 실정에 근거한 연구와 토론을 통해 제3의 창조적인 길을 열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생명, 생명경제, 생명도시 등 주요 개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생명

최근까지의 서구문명(서구사회 모두는 아니다)에서 생명이란 곧 인간을 말했다. 인간은 주체이자 주인이었고, 자연은 객체이자 대상이었다. 동식물과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한한 자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마음껏 이용하고 방치하는 데 어떤 책임감이나 죄의식도 가지지 않았다. 현대 들어 동물권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동물도 생명에 포함되었다. 반려동물에 이어 지금은 반려식물이라는 말까지 쓰일 정도로 동식물까지 생명으로 보는 시각이 확산되었다.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가 멸종한다는 가설이 합리적 예측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생명에 대한 이해는 전반적으로 확장되었고 깊어졌다.

오늘날에는 생명의 터전인 자연(무생물)도 생명의 개념에 포함되는 추세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생명은 개체가 아니라, 우주만물의 유기적 관계망, 혹은 통합적인 생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 전환의 결정적 계기는 기후위기다. 기후온난화에 큰 영향을 끼치는 대표적인 인간의 행위를 꼽으라면 화석연료 남용과 과도한 육식이다. 화석연료는 석탄/석유와 같은 무생물인데, 이 무생물의 남용이 지구 온난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육식도 마찬가지다. 산업화된 목축업에서 발생하는 메탄 등도 대표적인 온실가스로 꼽힌다. 지금처럼 인간이 화석연료 사용에 집착한다면, 과도한 육식 문화를 유지하면 이번 세기가 가기 전에 인류는 멸종할 것이다. 인간은 동식물과 자연에 의지해서만 삶을 유지할 수 있고, 관계망이 파괴되면 죽게 된다. 세계적으로 기후재난이 일상화되면서 지금은 이러한 인식이 보편적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전북생명경제라고 표현할 때, 기본이 되는 생명의 정의부터 제대로 되어야 한다. 생명은 곧 인간이라고 여겨 동식물이나 자연을 대상화했던 낡은 관점을 딛고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관계망 전체를 생명으로 보고 다음 스텝을 밟아가야 한다. 


# 생명산업

 생명을 인간에 국한해 보던 좁은 사고로 생명산업을 정의하면, 동식물과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산업시대의 폐해를 반복하게 된다. 이렇게 기존 산업화의 논리로 생명산업을 정의한다면 생명산업은 경쟁, 개발, 이윤,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과거의 관행에 매달리게 된다. 그것은 말만 생명산업이지 사실은 반생명에 가깝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은 경쟁, 개발, 이윤, 풍요의 추구만으로 유지되어 온 것이 아니다. 경쟁이 아닌 협동, 개발이 아닌 보존, 이윤이 아닌 나눔, 풍요가 아닌 소박한 삶 같은 것들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유지되어 왔다. 인류문명이 위기를 맞은 현재 상황에서 더더욱 생명산업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의 그물망을 살리고 가꾸는 산업이어야 한다. 자본의 논리에만 함몰되어 생명의 그물망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보기보다는 협동, 보존, 나눔, 소박함과 같은 생명의 가치에 주목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마땅할 것이다. 

사람으로 좁혀도 마찬가지다. 생명 가진 존재는 누구나 제 삶을 유지하고, 활기를 얻으려는 속성이 있다. 예컨대 오늘날 젊은 세대의 출산 기피는 경쟁이 치열하고 미래가 어두운 시기, 자연스럽게 개체를 조절하는 생태적 대응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아이 한 명 낳으면 무엇무엇을 해줄게’라는 보상 논리만으로는 해석되지도 않고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수도 없다. 당대를 사는 사람이 살 만한 세상,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서 해법이 나와야 실효를 거둘 것이다. 불가피하게 도래할 고령화도 마찬가지다. 노인이 많은 세상을 끔찍하거나 우울하게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세상 경험이 많은 고령층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상을 어울려 살 만한 곳으로 바꾸고 조정역할을 하는 완충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노인이 살 만한 세상이 돼야, 젊은이들은 자연스레 아이를 낳게 된다. 

지역소멸이나 인구감소에 대한 대응도 생명의 속성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골 마을에 사는 노인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거동을 못 하거나 치매가 와서, 집을 떠나 도시의 요양원에 실려가 죽는 것’이다. 그나마 경제력이 있는 지방의 노인들이 더 늙기 전에 수도권으로 역귀성하는 이유도 병원 가까운 대도시에 살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과연 노인만의 문제일까? 건강한 노후, 존엄한 죽음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 어떤 젊은이들이, 어떤 중장년 세대가 깃들고 싶겠는가. 전북에서 건강한 노후, 존엄한 죽음은 가능한가? 매우 단순하고 근본적인 이런 질문이야말로 생명의 산업화를 주장하기 전에 검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국 서머싯 프롬 마을은 2만8천 명 규모의 마을을 ‘의료체계의 공동체성 회복’을 중심으로 마을을 재조직한 모범사례다. 병원이 하나둘 사라지고, 주민이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의사와 사회사업가 두 사람이 주민들의 자발적 상호돌봄 방식으로 의료체계를 재구성했고, 소멸해가는 마을을 살려냈다. 영국 정부가 이 모델을 전국에 보급하는 데 나섰다고 하는데 이야말로 의료서비스가 낙후된 전북에서 의료적 대안의 측면에서, 지역소멸을 막기 위한 사회적 대안의 측면에서도 검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누구도 홀로 외롭게 병들지 않도록》, 2021, 남해의 봄날) 


# 생명도시

전북생명도시라는 말 가운데 ‘도시’라는 말이 갖는 의미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도시는 한국 사회의 압축성장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 대표적 결과가 수도권 집중이다. 한국은 수도권에 52%의 인구가 모여 산다. 일본은 28%, 프랑스 18.2%, 독일 7.4%이니 한국의 수도권 집중 현상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이다. 인구가 줄면서 수도권 집중 현상이 완화될 가능성은 더 낮아졌다. 도시화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도시화율은 85%. 전체 인구 5천170만 명 가운데 4천2백만 명이 도시에 살고, 1천만 명 정도가 읍면에 산다. 지역 인구 감소가 필연적이라 했을 때 수도권보다는 지역이, 지역 가운데 도시보다는 읍면부의 인구가 감소될 가능성이 높다. 읍면부 비중이 큰 전북, 경북 등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국가정책이 지금처럼 성장, 개발과 같은 가치에 편중된다면 도시화는 곧 흩어져 있는 인구를 거점도시로 이주시키고, 나머지 읍면지역은 마을별 지역별로 농업법인에 위탁경영하여 대농화하는 미국식 모델을 주장하거나, 선택과 집중의 논리로 특정 지역을 포기하고, 거기에 혐오시설을 밀집시키는 식으로 흐를 개연성이 높다. 

빈집이 늘고, 마을이 사라져가는 현상이 어제오늘 발생한 일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농촌 마을은 이미 고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대로 간다면 수년 내에 경제사회적 기능을 잃은 면단위가 속출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북도가 비전으로 생명의 도시를 꺼내들었다. 생명의 도시가 현실성을 가지려면 전북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읍면의 시골 마을을 어떻게 할지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마을은 인문-사회-경제-자연 환경이 집약된 생명의 터전이다. 이 터전이 고사되어 소멸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자연은 파괴되고(숲도 농지도 사람이 가꾸어야 탄소저감, 생태환경이 보존된다), 농업이 쇠퇴하면서 많은 생명의 터전이 사라지고(논 한 마지기의 담수 효과, 깃들어 사는 생명다양성 보존 등 농업의 생태효과), 이웃사촌이 사라지고, 마을의 역사와 문화가 빠른 속도로 소멸해 갈 것이다. 마을 소멸이 본격화되면 도시와 농촌 간에 차별과 격차가 커져서 곳곳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와 장벽이 형성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럴수록 수도권으로 도시로 몰릴 것이고, 빈자리를 지키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은 가중될 것이다. 우리나라같이 국토 면적이 좁고, 중앙 집중도가 높은 나라, 교통통신의 관계망이 발달한 나라에서 그것은 약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불행한 나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마을이 포기되고 버려지면 도시도, 국가도 제대로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지역소멸의 핵심은 마을의 소멸이다. 반대로 지역을 살리는 일도 마을에 대한 대책 없이는 실효를 거둘 수 없다. ‘생명경제’라는 말 뒤에 ‘도시’라는 말이 붙은 의미를 명료히 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도시화가 농촌 마을의 소멸을 의미했다면, 이러한 연장선에서 전북을 생명도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생명도시가 그저 관행적인 수사에 그치지 않으려면 이 점에 대한 자기정리도 필요하리라 본다. 


2. 생명평화 전라북도를 꿈꾸며


생명평화라는 단어는 20여 년 전 지리산 운동의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이 단어는 김지하 선생을 비롯한 생명운동의 선각자들과 도법스님을 비롯하여 지리산 운동을 함께 한 대중들이 좌우,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삶의 가치와 지향점을 찾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인간과 우주만물은 깊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크고 작은 어울림을 통해 서로를 돌보는 삶으로 전환시켜 내자. 그것이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최선의 몸짓이고, 자연도 뭇생명도 공존할 수 있는 길이다. 생명가치의 회복을 바탕으로 뭇생명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길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21세기 초입에 시작된 한국의 생명평화 운동은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는 자기성찰을 무엇보다 중시 여겼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가정이나 직장, 커뮤니티와 같은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마을, 지역사회, 국가, 인류, 지구별까지 생명평화 공동체로 재조직함으로써 각자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게 하자는 내용을 사회적 비전으로 삼고 있다. 필자가 속한 인드라망생명공동체나, 오늘 함께 모인 전북생명평화 포럼의 도반들은 이러한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도정 보고를 보면서 든 첫 생각은 세상의 거센 변화 흐름을 제대로 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우리는 지금 대전환기에 살고 있다. 전북도가 목표로 정한 2040년이 되기 이전에 세상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형편에 놓일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기후 위기다. 유엔(UN) 산하 ‘세계기상기구(WMO)’는 ‘2027년 안에 지구 평균 기온이 1.5도 오를 확률이 66%’라고 밝혔지만(2023. 5) 지구온난화의 속도는 우리가 예상한 바보다 훨씬 가파르다. 그 영향도 거세지고 있다. 올여름 폭염과 폭우로 온 지구가 몸살을 앓았듯이 재난의 일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듯하다. 

앞으로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2019년 유엔은 기후난민이 2050년경 10억 명 정도 발생한다고 예측하였지만, 현재 추세로 보면 이 또한 예상보다 훨씬 빨라질 것이다. 머지않아 수백 수천만 명 이상의 기후난민이 식량과 주거지를 찾아 이동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힘 있는 부자나라는 울타리를 견고하게 쳐서 난민 유입을 막을 테고, 울타리 안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 약탈이 일상화될 것이다. 그 고통은 대부분 약자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최근 아프리카를 탈출하는 난민을 막기 위한 유럽의 국경 통제 및 강화, 튀니지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나라에서 벌어지는 난민-거주민의 충돌 등은 그 전조로 볼 수 있다. 잘사는 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다. 탄소중립(에너지, 교통 등)으로 인한 산업 및 경제환경 변화 압력은 더욱 거세질 것이고, 팬데믹을 감안한 자립적 경제구조(식량안보, 에너지 안보 등) 확보 필요성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식량 자급률, 에너지 자급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이런 상황으로 몰려갈수록 농도인 전북의 역할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숲, 농지, 갯벌과 같은 생태적 자원이 중요한 시대가 되어갈 것이다. 

지금은 문명전환에 걸맞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역사를 성찰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개발과 보존의 이항대립을 넘어 지역발전과 주민행복을 생명평화의 관점으로 재정의하고, 그것이 바탕이 된 사회 운영원리, 경제질서, 새로운 민주주의, 교육과 문화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나로부터 시작하여 마을로, 지역사회로, 권역으로 투영된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봐야 한다. 그 일의 추진 방식 또한 지금과 같은 수직적 행정체계가 아니라 마을-지역-권역이 협력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협력과 지원의 관계로 맺어진다면, 그래서 천편일률적 토건 위주의 개발이 아니라 마을이 가진 생태/문화/역사 자원을 특색있게 발굴하여 개발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조금씩 틀 수 있다면 매우 많은 문제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전북의 실핏줄인 마을들이 저마다의 빛깔과 모양으로 곳곳에서 활력을 회복하며 살아나야 전라북도가 산다. 마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전라북도를 ‘세계적인 생명평화 교육장’으로 가꾼다는 식의 획기적인 상상이 지금은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 스스로 미래를 암울한 회색빛으로 절망하며 산다면 미래는 불행하게 올 것이고, 반대로 우리가 소중한 열망, 가치, 경험을 바탕으로 전환의 시대를 읽고 준비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마을을, 전북을,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가꿔가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서사’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서사가 담아야 할 방향성 정립을 위해 몇 가지 과제를 던져본다. 


❶ ‘농도 전북’은 과거의 굴레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농도 전북에서 생명경제도시로 전환) 전통적 농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전북의 생명 자원(생물· 청정자원)에 첨단기술을 융합한 생명산업으로 전환하고...”


도정 자료에는 <농도 전북 => 생명경제도시로 전환>이라고 비전을 적어 놓았다. 농도에서 벗어나자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하다. 적시한 대로 전북은 농도에 걸맞게 농지 보존 비중이 타 도에 견주어 월등히 높다. 위 자료에서는 전북의 경지면적 보존율은 62.4%(1970년 224,631ha → 2020년 140,247ha), 논 면적 보존율은 64.9%(1970년 151,423ha → 2020년 98,303ha)로 다른 도 평균 보존율(경지 48.4%, 논 46.7%)보다 월등히 높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보고서는 농지를 보존하고 지킨 탓에 전북은 가난한 도가 됐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식정보 시대, 기후위기와 문명의 전환을 말하는 지금, 생명도시를 말하려면 이러한 열패감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생명을 낳고 기르고 살리는 대표적인 일이 농사이고, 경제논리, 산업논리로 봐도 농업은 대표적인 생명경제, 생명산업이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농업은 식량산업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생태 문화 교육 등 건강한 사회구조의 토대로 주목받고 있다. 식량의 생산을 통한 먹을거리 공급은 물론이거니와 시민의 건강, 치유, 행복, 평온, 임종 등 삶의 다양한 가치에 농업을 접목하려는 시도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에서 농업을 6차산업으로 발전시키자는 말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도정 보고에는 전북의 역사를 생명중심 사상, 생명순환의 쌀문명, 4대강의 발원, 새만금 등으로 잘 정리해놓고도, 계획 단계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대신 무슨무슨 시설을 짓거나 외부 자본을 유치하여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산업화 논리만 도드라진다. 1970~80년대의 산업자본주의나, 1990년대 이후의 금융자본주의와 같은 성장주의 잣대로 보면 전북은 강점이 많지 않은 곳이다. 이런 산업화 시대의 계획들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문명전환이라는 대격변의 시기에 생명경제를 표방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음도 물론이다. 

‘농도’라는 전북의 역사는 낡은 유산이거나 벗어던져야 할 굴레가 아니다. 비록 산업화 시대에는 농업과 농지를 보존해 온 전북의 정책이 홀대받았지만, 어쩌면 이런 지체 과정을 통해 탄소중립, 식량자원 확보, 생태자원화 등에 필요한 미래의 훌륭한 자원이 그나마 보존된 것이기도 했다. 전북도가 생명을 이야기하려면 농토와 숲, 갯벌과 같은 전북의 자원을 보는 시각부터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❷ 새로운 서사의 주체는 ‘공동체적 삶으로 연결된 시민’이다.


사람들 저마다의 자의식이 산처럼 높아진 시절이다. 이렇게 자의식이 높아질수록 과거처럼 훌륭한 한 사람이 우매한 다중을 이끌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평범한 개인들이 조화로운 공동체로 연결되어 모두가 모두를 이끌어가는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거룩한 사람이 거룩한 일을 하거나,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일을 하는 것은 별다른 일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 진짜 거룩한 일이고, 평범한 사람이 거룩한 일을 해내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뢰와 사랑으로 연결된 공동체가 존재해야 한다. 전망은 흐릿하고, 절망이 지배하는 어려운 시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대안이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로부터 변화를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거룩하게 연결해낸 작은 공동체. 이 속에서 삶의 참된 의미를 체험하고 맛본 이들이, 그것을 마을로 세상으로 확장하자고 나섰을 때 제대로 된 사회변화, 문명전환은 시작될 것이다. 그 점에서 마을공동체는 인류의 미래이고, 공동체적 삶으로 연결된 시민은 새로운 서사의 주체이다. 이때의 시민은 국민, 주민, 주권자와 다른 개념이며, 권리의 주체인 개별자로서의 시민이라기보다는 사람・자연과 연대와 협동을 경험한 권리의 주체이자 책임의 주체로서 공동체 시민이다. 

지난해 실상사에서는 전국 10여 공동체들이 모여 ‘지리산 소풍’이라는 행사를 진행했다.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이들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각자의 현장에서 비슷한 희망의 씨앗을 가꾸고 있음을 확인했다. 전북에도 이런 공동체들이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다. 지구적으로 수천 곳은 될 것이다. 

생명평화 전라북도는 ‘생명평화’를 지향하는 시민들의 느슨한 연결망으로 현실화되어 가야 한다. 이 연결망은 자발성과 자율성을 가진 다양하고 작은 커뮤니티들로 출발하여 => (도시와 농촌의) 마을공동체 => 지역공동체 => 광역공동체로 동심원 방향으로 확장해 가면서 연결되어야 한다. 문명전환의 근거지이자 실핏줄인 마을들이 저마다의 빛깔과 모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전라북도가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지역 예산의 3~5% 정도라도 이러한 흐름을 지원하는 데 쓰일 수 있다면 훨씬 빠른 속도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전북이라는 광역 차원에서 이런 모범이 만들어진다면 생명평화 철학이 관통된 국가민족공동체 => 지구공동체의 선순환구조를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모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공동체적 삶으로 연결된 세계시민의 연결망을 이곳 전북에서 시작하여, 세계인들이 마을공동체를 배우기 위해 찾는 성지로 가꾸어지면 좋겠다. 


❸ 마을 단위를 활력 있게 가꾸는 일이 기본이다


마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을은 인문-사회-경제-자연 환경이 집약된 삶의 터전이다. 이 터전에 사람이 깃들어 살지 않는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자연은 파괴되고(숲도 농지도 사람이 가꾸어야 탄소저감, 생태환경이 보존된다), 농업이 쇠퇴하면서 많은 생명의 터전이 사라지고(논 한 마지기의 담수 효과, 깃들어 사는 생명다양성 보존 등 농업의 생태효과), 이웃사촌이 사라지고, 마을의 역사와 문화가 빠른 속도로 소멸해 갈 것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지역소멸의 핵심은 마을의 소멸이다. 마을이 포기되고 버려지면 도시도, 국가도 제대로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는 산내마을의 인구가 최근 2백 명 정도 줄었다. 얼마 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마을 모임이 시작되어 대책을 모색해 나가겠지만, 지난 20여 년간 귀농자들이 꾸준히 늘어온 마을조차 지속가능한 마을공동체가 되기에는 역부족임을 보여주었다. 50대 이상의 장년세대 귀농자들이 마을의 주축이지만, 이들의 자녀조차 마을에 정착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청년 세대의 특성도 있겠지만, 청년들이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나 지원체계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마을공동체를 일궈온 곳들의 형편 대개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형성된 마을공동체들이 지속가능하려면, 나아가 보편화된 사회모델로서 확산되려면, 마을공동체의 새로운 버전을 상상하고 준비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미래 세대들이 뛰어들 수 있도록 일자리, 주거 등 기반이 마련되어야 하고,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교육, 문화, 자치 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둘째, 마을 단위만으로는 불가능한 사회적 과제들. 예컨대 돌봄, 일자리, 주거, 에너지, 교통, 의료, 자원순환 등에 대한 마을 단위의 자구적 노력과 지자체, 광역단체 차원의 효율적 역할 배분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마을공동체의 한 단계 발전을 위해서는 선주민과 귀농자들이 함께 마을의 여론을 모아내는 광장, 혹은 원탁회의와 같은 공론장 형성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❹ 기초자치단체의 역할을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산내면이 속한 남원시의 예산은 연 1조 원에 육박하지만, 예산 대부분은 경직된 기성 질서를 유지하는 데 사용된다. 남원시 공무원의 상당수는 전주에 거주하며 출퇴근한다. 공무원의 자녀들도 거주를 꺼릴 정도로 도시는 쇠락하고 있지만, 기성 시스템의 유지 자체에 급급하고 있다. 새로운 실험이나 도전은 꿈도 꾸지 못하고, ‘지리산 산악열차’와 같이 과거의 개발 패러다임을 반복하고 있다. 다른 지자체도 상황은 비슷하리라고 본다. 이런 현실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기초자치단체는 전면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먹거리, 주거와 일자리, 돌봄, 문화와 놀거리 등 마을 단위에서 가능한 활동을 육성 지원하면서 의료 건강, 에너지, 재난 대비, 교통, 자원순환, 사회적 약자의 보호, 생물다양성 보호 등 마을 단위에서 추진하기에 한계가 있는 분야를 마을별로, 권역별로 횡으로 종으로 묶어 연대하고 협력하게 돕는 중간 지원조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이를 위해 관민이 연계하여 새로운 마을, 새로운 지역사회를 논의하는 거버넌스 기구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❺ 전북을 세방화의 모델로!


세방화(世方化, glocalization)는 지구적 연대와 책임, 지역적 실천과 대안을 병행하자는 신조어이다. 인류 보편의 사안인 기후위기, 전염병, 불평등에 대해서는 세계인들과 발맞추어 연대하면서, 다양한 방식의 지역적 방안의 실천을 결합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닌가 싶다. 세방화를 모색할 수 있는 적정규모(인구, 공간, 역사, 자원 등)가 전라북도 정도가 아닐까 싶다. 탄소중립, 식량・에너지 자립과 같은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여 광역 차원의 계획을 세우고 집행 점검하는 일과, 상호돌봄의 호혜 복지와 가치 있는 일자리를 연계하거나, 한계에 봉착한 교통 의료 교육 에너지 등의 지역사회 이슈들을 재디자인해 가는 것 역시 광역자치단체의 규모가 실효를 거두기에 적절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광역 차원에서 일을 해나가는 주체 또한 관-민이 연계된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광역 차원의 시민의회, 혹은 주제별 시민기획단 같은 것들을 실험해 볼 수 있으리라 본다. 

자본의 유치, 국가적 지원에 전적으로 매달린 개발 계획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행복은 성장과 개발에서 온다는 낡은 관점, 혹은 개발과 보존의 이항대립 관점에서 벗어나 생태적 가치, 발전, 시민 행복이 어우러지는 제3의 창조적인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생명 혹은 생명평화를 가치 기반으로 한 전라북도가 무엇을 말함인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 달성할 것인지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지역발전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 전북이 가진 생태, 영성, 문화 자원을 적극 활용하는 관점에서 전북발전 방향을 재설계해야 한다. 그랬을 때 전북은 지역소멸의 위기를 넘어 활로를 여는 국가적 모델이 되고, 지방정부 자결권 확대, 주민자치 확대 실험, 사회적 공론의 장 활성화 등과 같은 지속가능한 커뮤니티의 인류적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명실상부한 생명자치도, 생명평화자치도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 끝맺으며

‘효율, 성장, 개발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서사는 이미 사멸해 가고 있다. 그다음은 무얼까? 대전환기를 맞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생명의 힘을 믿고, 과감하게 상상해야 하며, 길 없는 곳에 용기 있게 첫발을 내딛어야 한다. 전북은 마을이 기반이 된 생명공동체로 가꾸기에 다른 어떤 광역단체보다 좋은 조건을 지녔다. 14개 시군. 그 속에 수많은 마을공동체들이 다양한 빛깔과 모양을 뽐내며 생명의 모자이크로 연결된다면, 세계인들이 탐방하는 대안문명의 성지, 탐방교육장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못 갈 이유도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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